인연 만들기

Life in Boston 2007/08/12 10:20

이틀을 달려도 이 넓은 초원, 평야는 끝이 나지 않았다.
정말 끝없이 펼쳐진 넓은 땅이다.
초등학교 6학년, 선생님께서 세계지도를 펴셨다. 미국 가운데를 짚으시며,

여기는 차를 타고 3일을 가도 끝나지 않은 평야라 말씀하셨다.
순진한 시골 소년, 소녀들을 믿을 수 없었다. 설마 그리 클까.
믿을 수 없었다. 청송 그리고 한국 땅을 벗어나본 적이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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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5년이 지난 오늘, 나는 이길을 달리고 있다. 정말이구나.
농사 짓는 평야, 이곳이야 말로 진정한 미국의 힘이라 생각한다.
어떤 앞선 나라보다 더 많은 힘을 지닌 곳이라 생각한다. 거대한 자원.

각종 자동차 첨단 산업이 발전한 미국이라 하지만,
미국은 아직도 전 세계의 농업대국으로 엄청난 힘을 지나고 있다.
그 힘은 나타낼 수 없지만 이 평야의 끝과 끝을 달려보면 알 수 있다.

할아버지도 같은 의견을 가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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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오늘 중으로 사우스 다코타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어제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려고
적당한 곳에서 잠을 자기로 했다. 지도 상에 보니 Chamberlain 이라는 도시가 들어왔다.
그리 작지 않을 것 같은 타운, 느낌이 좋았다.

얼핏 보아 강을 끼고 있는 듯했다. 서둘렀지만, 벌써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는 늦은 밤이다.
다리 위로 강을 건너는데 강위에 달이 보였다.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넓은 평야 위로 하늘은 더욱 낮았고 세상에서 가장 큰 듯한 보름달이 눈에 들어 왓다.

사진으로 간직하기보다는 마음 속에 그리고 싶었다. 카메라를 찾을려다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그 느낌을 사진으로 다 담기가 힘들 것 같았다.
한 장의 사진을 그 느낌을 넣는 것 보다 가슴 속에 마음 속에 담아 두고 싶었다.

물이 있고 들이 있으면 사람이 산다고 했던가. 그냥 이유없이 이 마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강은 힘차게 들을 가르고 있었고 그 들을 터전으로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었다.
아침 일찍부터 들리는 매미 소리도 반가웠다. 매미 소리 7년만이다. 여름날의 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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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소리가 정겹게 느껴지는 고즈넉한 마을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가방을 차에 싣고 나서 먼 곳을 보았다.
나즈막한 언덕 위 모텔 마당에서 마을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평야는 광대했지만, 그 안의 마을은 이뻤고 소박했다. 참 조용한 아침이었다.

여행은 낯선 곳에서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에 진정한 여행의 맛이 있는 것 같다.
오늘은 이런 시간을 가졌다. 모텔에서 일하시는 린다 아주머니를 만났다. 오랜 친구처럼 편안했다.
그런 이유인 즉 캘리포니아에서 삼촌따라 살다가 다시 태어난 고향으로 오셨다고 했다.

고향이 아침부터 보았던 이 마을이란다. 지금은 어릴 때랑 분위기가 많이 바꼈다고 하셨다.
이 시골 마을도 이제 점점 자기 밖에 모르는 동네가 되어간다고 안타깝다.
아들 자랑이 대단하셨다. 첫 자식이 딸이라면 아들 가질 때까지 애를 낳았을거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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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묻지 않아도 되었다. 농사 일에는 힘쓰는 아들이 좋지 않을까.
키가 180에 몸무게 200파운드인데 무거운 물건 다 들어준다고 하셨다.
소박한 웃음의 아주머니를 아들을 정말로 대견해 하셨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처럼

내가 다시 80번 길을 달리게 된다면 주저 없이 이 마을에서 잠을 잘 것이고 기회가 된다면
린다 아주머니를 찾을 것이다. 이렇게 나의 인연이 또 만들어졌다. 그리고 오래전 인연을 찾았다.
언제가 될 줄 모르지만 인연이 닿았으니 또 만나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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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밭으로 유명한 Iowa 주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에 들어서자, 난 설레기 시작했다.
그 옥수수 평야 한 가운데 Jewell 이라는 조그마한 동네가 있다. 내 고향 음지 마을과 비슷하다.
정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이 마을을 찾을 줄은 정말 몰랐다. 머리속에서만 찾을 줄 알았다.

이야기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교 시절부터 나는 펜팔을 하고 싶어했다.
인터넷이 난무하던 그 시절에 손으로 쓴 편지 한 장이 인연의 긴 꼬리가 되었다.
처음 몇번의 시도는 성공적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는 다시 pen pal 을 시작했다.
여러번 시도 끝에 처음으로 펜이 닿은 사람이 April Young, 아이와주 쥬웰에 살았다.
미국 지도 상에도 잘 나오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더 멀게만 느껴졌다.

나와 비슷한 또래친구였다. 한 2년을 편지 주고 받았다. 그리고 둘 다 대학에 진학한 사이 연락이 끊겼다.
어린 짐작 20통의 편지 속에서 아이와 주, 쥬웰은 그냥 설레는 가슴 속에 있었다. 한번 와보고 싶은 곳
아무런 일도 없었지만 그 때의 추억이 좋아 마냥 셀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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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질 때 온라인 상의 이름을 만들어야 했을 때,
나는 무작정 이름을 miss(그리워하다), jewell (동네이름) missjewell으로 만들어 버렸다.
사람들이 꽤냐 오해를 했다. 남자가 무슨 miss 냐고 어떤 미국 놈은 나를 이상 완전 이상하게 보였다.

내 이름의 얽혀진 사실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처음에는 일일이 해명을 했지만,
지금은 그냥 웃어넘어 가버린다. 중요한 것 가슴 곳에 담긴 추억이니까.
마음 속에 있던 그 집을 찾아 가기로 했다. 2년전에 기회가 있었다. 운이 좋아 그 애 아버지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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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 아주 드문 시골 동네에서 나를 모를까봐 예전에 그 친구에가 받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아버지는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나를 봐 주셨다. April 이 외국 펜팔 친구가 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그 기억을 가지고 찾아 올 줄은 몰랐었다. 미소가 멈추지 않는다.

2년이 지난 이번에는 운이 좋아 그 애도 볼 수 있었으면 했다. 재미 있을거랑 생각했다.
미국에 연수 오자마자 한번 더 편지를 했었는데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너무 멀다고 했다.
이번에는 직접 미국 땅에서 만나 그냥 추억을 꺼내고 싶었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야 하는가. 난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사진으로 보던 그 애 집만 한번 더 보고 나는 다른 사진을 남겼다.
인생사 인연이란 묘하다.

2007/08/12 10:20 2007/08/1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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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김규만 2007/08/15 00:53  address  modify  write

    missjewell 이 그런 의미였군. 몰랐던걸 알았네.
    jewellmemory 이라고 하던지 longforjewell 이라고 했으면
    여자란 오해는 안했을거 아냐?
    암튼, 여기 저기에 인연을 흩뿌리고 다니는 재만.
    인연으로 부자가 되겠다. 그치? ㅎㅎ

    • 노인학 2007/08/15 05:36  address  midify

      그 당시 생각나는 것 이것 밖에 없었서요...
      영어가 짧아서....